출처: IMDB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배리 린든>은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 사회적 상승과 추락, 그리고 운명의 아이러니를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큐브릭 특유의 시네마틱 오페라이다.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의 소설 '배리 린든의 행운과 불행'을 각색한 이 작품은 18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한 젊은 아일랜드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웅장하면서도 냉철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개봉 당시에는 다소 긴 러닝타임과 서정적인 템포로 인해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술적 가치와 미학적 성취는 재평가되어 이제는 큐브릭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미학의 정점
<배리 린든>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압도적인 비주얼이다. 큐브릭은 18세기 회화의 질감과 색감을 스크린에 옮겨놓기 위해 집착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인공조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자연광과 양초만을 활용하여 촬영한 장면들은 역사상 유례없는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나사(NASA)에서 개발한 초고감도 렌즈(Carl Zeiss Planar 50mm f/0.7)를 사용하여 양초의 미세한 불빛만으로도 실내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기술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이로 인해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당대의 초상화나 풍경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생생함과 동시에,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표정과 공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촬영 방식은 단순한 기술적 과시를 넘어선다. 18세기 귀족 사회의 우아함과 동시에 그 이면에 숨겨진 퇴폐와 허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연광과 촛불의 불완전한 조명은 인물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이는 곧 그들의 내면에 드리워진 숙명의 그림자를 암시한다. 또한, 당시 유럽 귀족들의 의상, 가발, 장신구, 그리고 저택의 내부 인테리어는 고증을 통해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마치 박물관을 거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미장센은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그림으로 만든다. 큐브릭은 이러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관객을 18세기 유럽으로 시공간 이동시키는 마법을 부린다.
운명론적 서사와 아이러니
영화는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배리 린든의 삶을 추적한다. 아일랜드 시골 청년 레드먼드 배리는 첫사랑을 잃고 복수를 위해 고향을 떠난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사기꾼 노릇을 하며 유럽 대륙을 떠돈다. 그러다 부유한 미망인 린든 부인을 만나 결혼하여 배리 린든이라는 새로운 신분과 함께 귀족 사회에 편입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그의 의지보다는 우연과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그는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하기보다는, 주변 상황과 인물들에 의해 끊임없이 이끌려가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영화의 내레이션은 이러한 운명론적 관점을 강화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등장하는 내레이터는 배리의 미래를 미리 알려주고, 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을 덧붙인다. 이는 관객에게 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인상을 주며, 그의 성공과 몰락이 결국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적 흐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배리가 귀족이 되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노력, 아들 불링던과의 관계, 그리고 그를 질시하는 주변 인물들의 암투는 모두 정해진 운명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그의 몰락은 상승만큼이나 예측 가능하며, 이는 인생은 결국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이라는 큐브릭의 냉소적인 인간관을 반영한다.
이러한 운명론적 서사 속에서 큐브릭은 아이러니를 심어놓는다. 배리는 계급 상승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그가 얻은 부와 명예는 결국 그의 내면을 좀먹고 행복을 앗아간다. 아들 불링던과의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그의 허세와 오만은 그의 몰락을 가속화한다. 영화는 배리의 삶을 통해 부와 명예가 진정한 행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인간의 욕망이 오히려 자신을 파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스탠리 큐브릭의 냉철한 시선
큐브릭은 <배리 린든>을 통해 18세기 귀족 사회의 허위와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영화는 당시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 결투로 대변되는 허례허식, 그리고 계급 사회의 모순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배리가 귀족이 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은 그 사회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불합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결투 장면은 특히 이러한 비판 의식을 잘 보여준다.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비합리적인 행위는 당시 귀족 사회의 허위의식을 상징한다.
큐브릭은 인물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관찰한다. 그는 인물들의 감정에 깊이 개입하기보다는, 그들의 행동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냉철하게 제시한다. 라이언 오닐이 연기하는 배리 린든은 잘생기고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고 다소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이는 관객이 배리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하기보다는, 그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큐브릭의 의도적인 연출이다. 이러한 거리 두기는 인간은 결국 환경과 운명의 노예일 뿐이라는 큐브릭의 회의적인 시각을 더욱 강조한다.
음악과 사운드의 역할
<배리 린든>의 사운드트랙은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헨델, 바흐, 비발디,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18세기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특히, 헨델의 사라방드는 영화의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되어 배리의 비극적인 운명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쓸쓸하고 비장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큐브릭은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음악을 통해 감정적 깊이를 더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조율한다.
음악은 때로는 인물의 감정을 대변하고, 때로는 다가올 불길한 사건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격정적인 사랑 장면에서는 로맨틱한 음악이 흐르지만, 이내 비극적인 상황이 닥치면 음악은 차갑게 식어버린다. 큐브릭은 음악을 통해 인물들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관객이 음악을 통해 그들의 상황과 감정을 유추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방식은 큐브릭 영화 특유의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 방식과 맞닿아 있다.
느린 템포와 긴 러닝타임
<배리 린든>은 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과 서정적이고 느린 템포로 진행된다. 현대 영화의 빠른 편집과 자극적인 전개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느린 템포는 큐브릭의 의도적인 선택이다. 그는 관객이 18세기 유럽의 풍경과 인물들의 삶을 충분히 음미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곱씹을 시간을 준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천천히 응시하고 그 안에 담긴 미학적 디테일을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긴 러닝타임은 배리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그의 성공과 몰락의 과정을 충분히 보여줌으로써, 큐브릭은 관객이 그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인내심을 가지고 영화를 감상한다면, <배리 린든>은 단순한 영화 관람을 넘어선,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배리 린든>은 큐브릭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시대극이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과 사회의 허위를 탐구했다. 완벽주의적인 연출, 회화적인 미장센, 그리고 운명론적 서사가 결합된 이 작품은 큐브릭이 추구했던 '완벽한 영화'에 가장 가까운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이 작품은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정의롭거나 불의롭거나, 모든 인간의 삶이 결국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말한다. 이는 배리의 삶의 덧없음과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운명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큐브릭의 냉소적인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배리 린든>은 처음부터 끝까지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영화이다. 그것은 인내심을 가진 자에게만 그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보석과 같다. 큐브릭의 시각적, 서사적, 그리고 철학적 통찰력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이 걸작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과 영감을 선사하고 있다. <배리 린든>은 단순한 오락 영화가 아닌, 예술 작품으로서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정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